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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노 아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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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사노 아키코는 1878년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태어난 일본의 시인, 작가, 평론가, 교육가이다. 그는 1901년 여성의 관능과 자아를 대담하게 표현한 시집 《미다레가미》를 발표하여 낭만주의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러일 전쟁 시기에는 반전 시를 발표했으며, 여성 해방 사상을 펼치며 육아의 동등한 분담, 경제적 자립,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또한 문화학원을 설립하여 남녀평등 교육을 실천했다. 하지만 만년에는 전쟁을 지지하는 시를 발표하여 사상적 일관성에 대한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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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노 아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사노 아키코가 창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요사노 아키코
본명쇼 호 (鳳 志やう)
출생1878년 12월 7일
출생지일본 오사카부사카이시
사망1942년 5월 29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스기나미구 오기쿠보
직업작가, 교육자, 시인, 평론가
국적일본
작품 활동
장르시, 에세이, 단가
사조낭만주의
주요 작품미다레가미 (1901년), 기미 시니타모우 코토 나카레 (1904년)
가족 관계
배우자요사노 뎃칸 (1901년 - 1935년)
자녀13명
친척호 슈타로(형), 호 주사부로(동생), 요사노 카오루(손자), 요사노 다츠(손자), 요사노 후미코(손녀), 요사노 히사시(손자)

2. 생애

요사노 아키코는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전통 과자점 스루가야(駿河屋)의 셋째 딸로 태어나, 1899년 관서청년문학회 입회를 통해 요사노 뎃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1901년 뎃칸과 결혼 후, 러일전쟁에 참전한 동생을 걱정하며 쓴 반전시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일본어)를 발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14][15] 1912년 남편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여 유럽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1년 분카가쿠인(Bunka Gakuin, 문화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학감으로 취임, 남녀평등 교육을 실천했다.[12] 만년에는 뇌출혈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42년 협심증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요사노 텟칸·아키코 거주지 터(도쿄 우체국 병원 부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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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요사노 아키코의 가족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호 소시치1847년[65]1903년[66]
어머니호 쓰네1851년[67]1907년[68]
친형호 슈타로1872년1931년전기 공학자
남동생호 주사부로1880년[67]1944년[65]
장인요사노 레이겐1823년1898년승려, 가인
남편요사노 뎃칸1873년1935년가인
장남요사노 히카리1902년[69]1992년[70]의사
차남요사노 슈1904년[71]1971년외교관
차남의 아내요사노 미치코1915년2000년평론가, 수필가
장녀요사노 야호1907년[72]1992년쌍둥이
차녀요사노 나나세1907년[73]?쌍둥이
삼남요사노 린1909년[74]1964년
삼녀요사노 사호코1910년[75]?
사녀요사노 우치코1911년[76]2005년
사남요사노 아우구스토(이쿠로)1913년[77]1985년기계 기술자
오녀요사노 엘렌느(사치코)1915년[78]1991년
오남요사노 켄1916년[79]1991년스미토모 금속 공업 주식회사 부사장
육남요사노 스1917년[80]1917년생후 2일 만에 사망
육녀요사노 후지코1919년[81]2012년
손자요사노 가오루1938년2017년정치가
손자요사노 토오루1941년[82]금융가
손자요사노 후미코1947년시인, 미술 평론가
손자요사노 히사시1946년건축가
증손요사노 신1975년[83]외자계 회사원



아키코는 평생 11번의 출산을 경험했다. 쌍둥이는 2번이었고, 한 쌍은 성장했고, 다른 한 쌍은 한 명이 사산되었다.[84] 아키코는 돈이 들지 않는 요리를 연구하고, 피안의 오하기나 츠키미단고 등을 직접 만드는 등, 계절의 맛과 행사를 소중히 했다.[87]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아키코는 1878년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전통 과자점 스루가야(駿河屋)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37] 12세 무렵부터 가업을 도와 장부를 기록하거나 대나무 껍질로 단팥묵을 포장하는 등 일에 쫓기는 생활을 했다. 훗날 유년 시절을 회상한 글에서 그녀는 “밤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밤 12시에 꺼지는 전등 아래서 겨우 1시간 또는 30분 부모의 눈을 피해가며 내가 읽은 책들은 여러 가지 공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어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고 술회했는데, 답답한 일상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벗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었다.

아버지의 장서였던 ≪겐지모노가타리≫, ≪마쿠라노소시≫, ≪영화 이야기≫ 등 고전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동경하며 소녀 아키코는 암울한 현실 너머에 있는 감미로운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독서 목록에는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빠가 보내오는 당시의 최신 문예 잡지와 신소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학교 졸업 후 진학한 사카이 여학교(현 오사카부립 센요 고등학교)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봉건적 여성 교육을 주로 하는 학교였으나, 아키코는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체감하고 가부장적 구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의식을 키워갔다.

2. 2. 문단 활동과 결혼

1899년 아키코는 서일본 지방 문학 청년들의 모임인 관서청년문학회에 입회하여 문학 청년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00년 요사노 뎃칸을 만나 불륜 관계가 되었고, 뎃칸이 창간한 문예지 《묘조(明星)》에 단가를 발표했다.[7][8] 1901년 가출하여 도쿄로 이주, 뎃칸과 결혼하고 《미다레가미(헝클어진 머리칼)》를 출간하여 낭만주의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미다레가미》는 대부분의 문학 평론가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나,[7][8] 자유사상가들에게 널리 읽히며 일종의 등대 역할을 했다.

《미다레가미》는 메이지 시대 말기에 열정적인 개인주의를 전통적인 단가 시에 불어넣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집에서 아키코는 여성성을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하였는데, 당시 일본 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과 문학적 관습에 도전하는 것이었다.[8] 예를 들어, "봄은 짧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이 무엇인가?'라고 나는 말했고, 그의 손이 내 풍만한 가슴을 찾게 했다."[8]와 같은 구절은 여성의 성과 신체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제시하며, 이전까지 수유와 모성의 상징이었던 가슴을 자연미와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바꾸었다.[8]

사사키 노부츠나는 단가에서 가슴에 대해 쓴 요사노 아키코를 "공공 도덕을 타락시킨" "창녀에게나 어울릴 음담패설을 늘어놓은" 혐의로 공격하기도 했다.[10]

결혼 후에도 아키코는 소설, 시, 평론, 고전 연구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으며, 11명의 자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가는 정력적인 삶을 영위했다.

아키코와 그녀의 남편 요사노 뎃칸

2. 3. 작품 활동과 사회 참여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한 동생을 걱정하며 쓴 반전시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일본어)를 발표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14][15] 이 시는 무사도의 핵심 개념을 비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고 비꼬았다.[19]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무의미하고 어리석다고 칭하며 일본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인이 되었고, 정부는 그녀의 시를 금지하려 했다.[18]

1911년 일본 최초의 여성 문예지 《세이토》(青鞜) 창간호에 〈산이 움직이는 날이 온다〉(山動く日來る)를 기고하여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했다.[21] 1912년 남편과 함께 프랑스 파리를 방문, 유럽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귀국 후 소설, 시, 평론, 고전 연구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11명의 자녀를 양육했다.

1921년 분카가쿠인(Bunka Gakuin, 문화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학감으로 취임, 남녀평등 교육을 실천했다.[12] 문화학원에서는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인간 교육을 목표로 하여, 자유로운 복장 등 교칙에 얽매이지 않고, 문화와 예술로 감성을 키우는 교육을 실시했다. 커리큘럼은 광범위하며, 특히 예술 관련 과목이 많았고, 교원으로는 작곡가나 화가 등 전문가가 참여했다.[63] 1923년부터 남녀 공학이 되었다.[64]

2. 4. 만년과 죽음

만년에는 뇌출혈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42년 협심증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아키코가 남긴 가집은 20권, 약 5만 수에 달한다. 묘는 도쿄 다마 영원에 있다.

3. 주요 작품

요사노 아키코는 시, 산문,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특히 단가에 있어서는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내용과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시'''

요사노 아키코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평생 동안 2만 편에서 5만 편 사이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 중에는 묘조에 그대는 죽지 말지어다[14]를 발표하여 반전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르기도 했다.

'''산문'''

요사노는 11권의 산문집을 썼지만, 문학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11]

'''사회 비평'''

다이쇼 시대에는 ''인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Hito oyobi Onna to shite), ''격동 속을 살아간다''(Gekido no Naka o Iku), 자서전 ''밝은 곳으로''(Akarumi e) 등 사회 비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기타 작품 목록'''


  • 정본 요사노 아키코 전집 전 20권 (고단샤, 1979년 - 1981년)
  • 뎃칸 쇼시 전집 전 32권 (벤세이 출판, 2001년 - 2011년). (본문편 31권 + 최종권은 전 가집 오구 색인편)
  • 뎃칸 쇼시 전집 별권 전 8권 (유실편 단가, 벤세이 출판, 2013년 - 2021년). 이루미 쿠미 외 편
  • 호 쇼시 '미다레가미' 명저 복각 전집 22 · 일본 근대 문학관
  • * 미다레가미 (호르푸 출판, 1984년). 일본의 문학 7권, 이치코 사다지 · 오다기리 스스무 편
  • * 미다레가미 (신초 문고), 외에 하루키 문고
  • * 미다레가미 부 = 미다레가미 유실 (곤노 스미 역주, 신판 · 가도카와 문고)
  • 요사노 히로시 아키코 서간집 (야기 서점)
  • 나의 성장 (여성 문고: 가쿠요 서방) 삽화 타케히사 유메지
  • 동화 고리의 일 년간 (이즈미 서원)
  • 어머니의 사랑 요사노 아키코의 동화 (부인 화보사, 1998년)
  • 머리털 다섯 자 되면 물에 부드럽게 젖는 소녀의 마음은 숨겨서 놓아주지 않으리 (『흐트러진 머리카락』)
  • 청수(清水)로 기온을 지나가는 벚꽃 든 달밤 오늘 밤 만나는 사람 모두 아름다워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 부드러운 살결의 뜨거운 핏줄에 닿아보지도 않고 외롭지 않다 하는 길을 설파하는 그대 (『흐트러진 머리카락』)
  • 누구를 보아도 부모 형제의 마음이 드네 지진이 멎고 아침이 되면 (『유리광』) - 『지금 옛적 수려한 노래 100선』: 선정자: 츠치야 히로시(일본 오토 스포츠 센터 이사장)

3. 1. 시집

1901년, 요사노는 400편의 시를 담은 첫 번째 단가 시집 ''미다레가미(みだれ髪, 흐트러진 머리칼)''를 출간했다.[7][8] 이 시집은 대부분의 문학 평론가들에게 비난받았지만, 널리 읽히며 당시 자유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 시대 말기에 열정적인 개인주의를 전통적인 ''단가'' 시에 불어넣은 이 작품은 그녀의 첫 번째 책이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대부분의 시는 요사노가 요사노 뎃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사랑 시였다. 이 시집을 통해 그녀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현대 일본 여성의 목소리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특히 여성 작가로서는 당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표현했다.

''미다레가미''는 여성과 관련된 개념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활기차고 자유로우며 성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성을 나타내는 혁신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다.[8] 이는 일본에서 기대되는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8] 요사노의 여성들은 자신의 사랑 생활에서 적극적인 주체였다. 전형적인 ''단가''에서 요사노는 "봄은 짧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이 무엇인가?'라고 나는 말했고, 그의 손이 내 풍만한 가슴을 찾게 했다."[8]라고 썼다.

''미다레가미''는 일본 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과 당시의 문학적, 문화적 관습에 도전했다. 비록 비난과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8] 미국의 학자 히로미 츠치야 돌라스는 "살, 입술, 가슴의 시각적 표현은 여성의 성을 상징한다"고 언급했다.[8][9]

이전까지 어떤 시인도 ''단가''에서 가슴에 대해 쓴 적이 없었기에, 시인 사사키 노부츠나는 그녀를 "공공 도덕을 타락시킨" 혐의로 공격했다.[10] ''미다레가미''를 통해 누드에 대한 개념은 일본인들이 에로티시즘과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여성의 가슴은 수유와 모성의 상징에서 자연미, 특히 젊은 여성의 자연미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변화했다.[8]

요사노는 이후 《사랑의 옷》(Koigoromo), 《무희》(Maihime) 등 20권의 단가 선집을 출판했다. 남편 요사노 뎃칸도 시인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아키코에게 가려졌다. 그는 아내의 작품 출판을 돕고 문학 경력을 장려했다. 요사노 아키코는 평생 동안 2만 편에서 5만 편 사이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미다레가미(みだれ髪) (1901년)
  • 그대는 죽지 말지어다(君死にたもうこと勿れ) (1904년)


정열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가집 『미다레가미』는 여성의 자아와 성애를 표현하여 낭만파 가인으로서의 스타일을 확립했다.[52] 전통적인 가단으로부터 반발을 받았지만,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가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2. 번역

요사노 아키코는 고전 작품 번역에도 힘썼다. 대표적인 번역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新訳源氏物語|신야쿠 겐지모노가타리일본어
  • 新訳栄花物語|신야쿠 에이가모노가타리일본어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번역서 및 관련 서적들이 출판되었다.

  • 완역 겐지 이야기 상·중·하 (가도카와 문고 클래식)
  • 큰 글씨판 '더 겐지 이야기' 전문 대역 (다이산쇼칸)
  • 개요 겐지 이야기 (무사시노 서원) 쓰루미 대학 문학부, 이케다 토시오 편
  • 요사노 아키코 역 가게로 일기 (헤이본샤 라이브러리)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이즈미 시키부 일기 (가도카와 소피아 문고)

3. 3. 평론

이와나미 문고에서 《요사노 아키코 평론집》이 출판되었고, 고단샤 문예 문고에서는 《사랑, 이성 및 용기》가 현대 일본의 에세이로 출판되었다. 오조라샤에서는 여인 창조 총서 여성론이 출판되었다.[1]

4. 사상과 영향

요사노 아키코는 여성 해방, 반전 평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세이토』 등에 기고하며 여성의 자립과 주체적인 삶을 강조했으며, 특히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히라츠카 라이초를 비롯한 당시 많은 일본 페미니스트들과 의견 대립을 하기도 했다.[23][24] 모성 보호 논쟁을 통해 여성의 권익 향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러일 전쟁 당시에는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君死にたもうこと勿れ)라는 시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했다.[14] 이 시는 발표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15] 동시에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1921년에는 남편 뎃칸과 함께 문화학원을 설립하여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실천했다.

4. 1. 여성 해방 사상

요사노 아키코는 여성 문학 잡지 『세이토』 등에 기고하며 여성의 자립과 주체적인 삶을 강조했다. 육아의 동등한 분담, 경제적 자립, 사회적 책임을 주장했으며, 특히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위해 남성의 재정에 의존한다면, ... 남성의 노예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자의 노동의 결실을 갈취하는 도둑이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히라츠카 라이초를 포함한 당시 많은 일본 페미니스트들의 의견과 대립했다.[23] 히라츠카 라이초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재정적 지원 없이는 현실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비판했다.[24]

요사노는 13명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산이 자신의 정체성의 주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25] 여성성을 모성애와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모성애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 무수한 욕망과 역할에 순위를 매기는 낡고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에 여성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1915년, 요사노는 엘렌 키와 레프 톨스토이에 대한 응답으로 여성들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역할 외에도 친구, 아내, 일본 시민,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더 많은 것을 예시한다고 주장했다.[27][28]

요사노는 모성애가 정부에 의해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며, 이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도 남자에게 의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혼과 삶은 협력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한 성별에 의존하는 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11]

1912년 5개월간의 유럽 여행을 통해 자립한 여성들을 직접 보면서, 이후 "모성 보호 논쟁"의 기반을 다졌다.[55]

요사노는 여성이 스스로 자기 수련을 통해 인격을 도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미 사상적인 개인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또한, 수학을 매우 잘했으며, "여성도 자연과학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62]

히라츠카 라이초가 주장하는 모성 중심주의는 형태를 바꾼 새로운 현모양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야마다 와카 등과 함께 모성 보호 논쟁을 벌였다. "부인은 남자에게도 국가에게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 야마카와 키쿠에는 사회주의 입장에서 부인 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밝히고, 차별 없는 사회에서만 부인의 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논쟁을 정리했다.

4. 2. 반전 평화 사상

요사노 아키코는 러일 전쟁 당시 묘조에 발표한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君死にたもうこと勿れ)[14]라는 시를 통해 전쟁의 비극성과 무의미함을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했다.[19] 이 시는 러일 전쟁의 참혹한 포트 아서 공방전을 배경으로, 남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15][17] 특히, "인간 총알"로 사용되는 일본 군인들의 현실을 알게 된 후, 무사도 정신에 따라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을 제기했다.[16]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는 발표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15] 정부는 이 시를 금지하려 했고, 요사노의 집은 돌을 맞는 등[20] 반발도 있었지만, 동시에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그러나 만년에 요사노 아키코는 시베리아 출병에 반대하고, 쌀 소동과 관련하여 당시 테라우치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반공산주의, 반소련 입장에서 논전을 펼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도 비판하여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3. 교육 사상

요사노 아키코는 1919년 (다이쇼 8년) 중앙공론 5월호에 「교육의 국민화를 바라며」(단행본 『격동 속을 걷다』에 『교육의 민주주의화를 요구한다』로 개제)라는 글을 썼다.[59] 여기서 아키코는 각 부현 시정촌(市町村)에 민선 교육 위원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교육은 "문부성의 전제적인 재단에 굴종한 교육"이었으므로, 이를 "각 자치체의 교육 위원들의 자유 재량에 일임"하여 "교육이 국민 자신의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럽의 노부인이 젊은 부인과 함께 여러 사회 봉사에 힘쓰는 모습을 보고, 일본에도 성인 교육과 사회 교육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21년(다이쇼 10년), 아키코는 남편 뎃칸과 함께 문화학원을 설립하고 교사가 되었다. 문화학원에서는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인간 교육을 목표로, 자유로운 복장 등 교칙에 얽매이지 않고 문화와 예술로 감성을 키우는 교육을 실시했다. 교과 과정은 광범위했으며, 특히 예술 관련 과목이 많았다. 작곡가나 화가 등 전문가들이 교원으로 참여했다.[63] 처음에는 중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던 여성을 위한 중학부로 시작하여 40명의 여학생이 입학했다. 1923년(다이쇼 12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64]

5. 한국과의 관계

요사노 아키코의 작품은 한국에도 번역 소개되어 여성 문학과 여성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여성주의 문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아키코의 작품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2019년에는 김화영, 엄인경, 이혜원 등이 번역한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이 출간되어 아키코의 문학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1]

번역자제목출판사출판일
김화영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2: 요사노 아키코 1어문학사2019년 3월 31일
엄인경·이혜원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3: 요사노 아키코 2어문학사2019년 3월 31일


6. 비판 및 논란

요사노 아키코는 뛰어난 시인이자 작가였지만, 그녀의 사상과 행동에는 몇 가지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특히 러일 전쟁 당시 반전시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만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옹호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여 초기 입장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사상적 일관성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첫 단가 시집 《미다레가미(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남성과의 사랑과 연결시키는 경향을 보여 전통적인 여성성에 대한 낭만적 시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6. 1. 반전 사상의 일관성 부재

요사노 아키코는 러일 전쟁 당시 묘조에 반전시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君死にたもうこと勿れ)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14][15] 이 시는 포트 아서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인간 총알'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과 남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다.[16][17] 요사노는 무사도의 핵심 개념을 비판하며,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19] 이 시는 일본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 중 하나가 되었고, 정부는 이 시를 금지하려 했다.[18] 요사노의 집은 돌을 맞기도 했으며, 그녀는 언론인 大町桂月|오마치 게이게쓰일본어 등과 전쟁 지지 여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20]

그러나 만년에 요사노 아키코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옹호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여, 초기의 평화주의적 입장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입장 변화는 그녀의 사상적 일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을 받았다.

6. 2. 여성관의 한계

1901년 요사노 아키코가 펴낸 첫 단가 시집 《미다레가미(흐트러진 머리카락)》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여 당시 문학 평론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7][8] 그러나 이 시집은 널리 읽히며 자유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여성의 주체성과 자립을 강조하는 아키코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미다레가미》에서도 여성의 성적 욕망을 남성과의 사랑과 연결시키는 경향을 보여, 전통적인 여성성에 대한 낭만적 시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8] "봄은 짧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이 무엇인가?'라고 나는 말했고, 그의 손이 내 풍만한 가슴을 찾게 했다."[8]라는 시구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면서도 이를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묘사한다.

전통적인 일본 가치관에서 여성은 부드럽고 겸손하며, 가정 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은 남자아이 출산과 양육에 초점을 맞추도록 기대되었다.[8] 《미다레가미》는 활기차고, 자유롭고, 성적이며, 적극적인 여성성을 나타내는 혁신적인 이미지를 창조했지만,[8]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아키코 요사노의 작품은 비난과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8] 미국의 학자 히로미 츠치야 돌라스는 "살, 입술, 가슴의 시각적 표현은 여성의 성을 상징한다"라고 언급했다.[8][9]

그전까지 어떤 시인도 단가에서 가슴에 대해 쓴 적이 없었고, 이는 시인 사사키 노부츠나가 잡지 기사에서 아키코를 "공공 도덕을 타락시킨", "창녀에게나 어울릴 음담패설을 늘어놓은" 혐의로 공격하게 만들었다.[10] 《미다레가미》를 통해 누드에 대한 개념은 일본인들이 에로티시즘과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이전까지 여성의 가슴은 수유와 모성의 상징이었으나, 이후 가슴은 자연미, 특히 젊은 여성의 자연미를 나타내는 다른 상징성을 띠기 시작했다.[8] 일본 여성들은 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8]

7. 평가

1901년, 요사노는 400편의 시를 담은 첫 번째 시집 단가 미다레가미(흐트러진 머리카락)를 출간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문학 평론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7][8] 비평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널리 읽혔고 당시 자유사상가들에게 일종의 등대 역할을 했다. 그녀의 첫 번째 책이자 가장 잘 알려진 이 작품은 메이지 시대 말기에 다른 어떤 작품과도 달리 열정적인 개인주의를 전통적인 ''단가'' 시에 불어넣었다.

대부분의 시는 아키코가 요사노 뎃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랑 시였다. 그녀는 이 특별한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일본 여성의 목소리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이 시들은 특히 여성 작가로서는 당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통적인 일본 가치관에서 여성은 부드럽고 겸손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다.[8] 일본 여성의 가정 내 역할과 사회적 역할은 특히 남자아이의 출산과 양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다레가미''는 여성과 관련된 개념 및/또는 문제를 공공연하게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활기차고, 자유롭고, 성적이며, 적극적인 여성성을 나타내는 혁신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이는 일본에서 기대되는 겸손하고 수줍은 젊은 여성의 전통적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8] 요사노의 여성들은 수동적이지 않고, 자신의 사랑 생활에서 적극적인 주체였다. 전형적인 ''단가''에서 요사노는 "'봄은 짧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이 무엇인가?'라고 나는 말했고, 그의 손이 내 풍만한 가슴을 찾게 했다."라고 썼다.[8] ''미다레가미''는 일본 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뿐만 아니라 당시 받아들여지던 문학적, 문화적 관습에도 도전했다. 아키코 요사노의 작품은 비난과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8] 미국의 학자 히로미 츠치야 돌라스는 "살, 입술, 가슴의 시각적 표현은 여성의 성을 상징한다"고 언급했다.[8][9]

그전까지 어떤 시인도 ''단가''에서 가슴에 대해 쓴 적이 없었고, 이는 시인 사사키 노부츠나가 잡지 기사에서 그녀를 "공공 도덕을 타락시킨" "창녀에게나 어울릴 음담패설을 늘어놓은" 혐의로 공격하게 만들었다.[10] ''미다레가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누드에 대한 개념은 일본인들이 에로티시즘과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전까지 여성의 가슴은 수유와 모성의 상징이었다. 그 후 가슴은 자연미, 특히 젊은 여성의 자연미를 나타내는 다른 상징성을 띠기 시작했다.[8] 일본 여성들이 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상상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8]

8. 기타

요사노라는 성은 교토부 요사군 요사노정에서 유래한다.[92]

1988년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꽃의 난』(도에이 교토 제작소 제작)은 요사노 아키코의 생애를 다루며, 요시나가 사유리가 아키코를 연기했다.

1998년 5월, 아키코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여 난카이 본선 사카이역 서쪽에 동상이 세워졌다.

아키코의 손자 요사노 가오루일본의 정치인으로, 재무 대신, 내각관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가오루는 만 3세 9개월 때 할머니 아키코가 사망했으며, 처음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여 낭인 생활을 할 때 할머니의 시집 『미다레가미』를 복각했다.[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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